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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온 (후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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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장온은 후한 말기의 인물로, 환관 조등의 제자이자 사공, 사도를 역임했다. 황건적의 난 당시 주준을 옹호하고, 양주 반란 진압에 나섰으나 동탁과의 갈등으로 인해 결국 191년에 동탁에게 무고를 받아 처형당했다. 삼국지연의에서는 동탁의 명령으로 여포에게 참수당하는 인물로 묘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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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온 (후한)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름장온
로마자 표기Jang On
백신(伯慎)
출생지형주남양군양현
사망일초평 2년 (191년) 11월 5일
사망지장안
배우자채부인
관직
봉작호향후(互鄉侯)
최종 관직위위(衛尉)
주요 경력사공(司空)
태위(太尉)
거기장군(車騎將軍)
대사농(大司農)
생애
활동 시기후한 말기
주요 활동서강 반란 진압
동탁 암살 계획 연루

2. 생애

장온은 후한 말기의 관리로, 남양군 출신이다. 환관 조등의 추천으로 관직에 나아가 환제 때 상서랑 등을 지냈다.

이후 영천군 태수를 거쳐 184년에는 사공, 같은 해 사도로 승진했다. 유능하다는 평가를 받았으나, 당시 영제가 관직을 돈으로 팔던 관행에 따라 그 역시 뇌물을 바치고 임명되었다는 비판도 받았다. 황건적의 난 때는 사도로서 주준을 변호하여 그가 남양 방면에서 공을 세우는 데 기여했다.

185년에는 양주 반란 진압을 위해 차기장군으로 임명되어 10만 대군을 이끌었으나, 부하 장수 동탁과의 갈등과 통제 실패, 손견의 조언 거부 등으로 결정적인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다. 이 과정에서 동탁과 깊은 원한을 맺게 되었다.

186년 태위에 임명되었으나 이듬해 사임했고, 188년에는 녹상서사(錄尙書事)로 복귀하여 하순을 경조윤으로 추천하기도 했다.

동탁이 집권한 후 조정을 따라 장안으로 이동하여 191년 위위가 되었다. 동탁의 폭정에 반발하여 사도 왕윤과 함께 동탁 제거를 모의했으나, 계획이 실행되기 전 동탁에게 발각되었다. 동탁은 과거의 원한과 태사령의 불길한 점괘를 빌미 삼아 장온이 원술과 내통했다는 무고를 씌워, 191년 11월 5일(음력 10월 1일) 장안 시장에서 매질하여 잔인하게 살해했다.

2. 1. 초기 생애와 관직 진출

장온의 가문은 남양군에 기반을 두고 있었다. 형제로 장창이 있었는데, 그는 환제 때 군의 관직을 지냈고, 168년에는 대장군 두무 아래 있었다. 장온은 영향력 있는 환관 조등의 추천을 받아 상서랑으로 관직을 시작했으며, 환제 재위 기간 동안 비서 업무를 맡았다.

이후 영천군 태수를 지냈다. 184년에는 장제의 후임으로 사공에 임명되었고, 같은 해 사도로 승진했다. 장온은 유능한 관리로 평가받았으나, 당시 영제가 도입하여 비판받던 관행에 따라 자신의 임명을 위해 뇌물을 바쳐야 했다.

장온은 황건적의 난 당시 사도직에 있었는데, 황제를 설득하여 군사 지휘관 주준이 해임되는 것을 막았다. 주준은 이후 남양군에서 황건적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었다. 185년, 황보숭이 양주에서의 반란 진압에 실패하자 장온은 차기장군으로 임명되어 10만 군대를 이끌고 반란군 토벌에 나섰다. 이때 손견, 도겸 등을 참모로 삼고 동탁과 합류했으나, 처음부터 동탁을 통제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동탁이 장온에게 무례하게 굴었음에도, 장온은 군사 고문 손견의 처형 건의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2. 1. 1. 늙은 농부와의 만남

연희 연간(158년~166년)에 상서랑이었던 장온은 환제의 장릉 행차를 수행하였다. 행차가 운몽을 지나 면수에 이르렀을 때, 길가의 백성들은 모두 황제의 행렬을 구경하러 나왔으나, 밭을 갈던 한 늙은 농부만은 자리를 지키고 일에 열중하고 있었다.

장온은 이를 이상하게 여겨 사람을 보내 농부에게 물었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구경하러 오는데, 당신만 그러지 않는 것은 왜입니까?" 그러나 늙은 농부는 웃기만 할 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이에 장온이 직접 말에서 내려 농부에게 다가가 정중히 다시 물었다.

그러자 농부는 다음과 같이 답하였다.

"저는 아는 것이 없는 시골 사람이라 어려운 말씀은 잘 모릅니다. 다만 묻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천하가 어지러워 천자를 세운 것입니까, 아니면 천하가 잘 다스려지고 있어 천자를 세운 것입니까? 천자를 세우는 것은 천하 만민을 자식처럼 돌보기 위함입니까, 아니면 천하 백성을 부려 천자 한 사람을 섬기게 하려는 것입니까? 옛 성군들께서는 누추한 곳에 사시면서도 백성을 편안하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지금 당신의 주군은 백성들을 힘들게 하면서 자신은 놀이에 빠져 부끄러움조차 모르니, 내가 당신을 위해 부끄러움을 느낍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백성들에게 구경 나오라고까지 하십니까!"

장온은 농부의 날카로운 지적에 깊이 부끄러움을 느끼고 그의 이름을 물었으나, 농부는 끝내 아무 말 없이 자리를 떠났다. 이 일화는 당시 황제의 사치와 백성들의 고충을 보여주는 사례로 언급된다.

2. 2. 순상과의 교류

장온은 수도 낙양에서 조요, 가표, 순상, 이섭 등 당대의 명사들과 교류하였다. 이후 영천 태수로 임명된 장온은 순상을 만나고 가표와 함께 자리하여 논쟁을 벌였다. 이 논쟁은 수도에서 큰 화제가 되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며 누가 더 뛰어난지에 대한 이야기가 오갔다.

장온은 조요에게 이섭(자: 덕공)이 이 논쟁에 대해 어떻게 평했는지 물었다. 조요는 "아무 말도 없었다"고 답했다. 그러자 장온은 탄식하며 "덕공처럼 되어야 할 텐데! 섣부른 사람들을 부추겨 흥분시키지 않는구나"라고 말했다. 이 말을 들은 순상 역시 깨달음을 얻고 자신의 태도를 고쳤다고 한다.

2. 3. 조정에서의 활동과 황건적의 난 진압

훗날 상서령이 되었고, 양선을 천거하여 상서복야로 삼았다.

광화 7년(184년) 여름 4월, 대사농이었던 장온은 장제의 뒤를 이어 사공에 임명되었다. 장온은 단경, 번릉, 최열 등과 함께 공적과 명성을 쌓았으나, 당시 영제가 도입하여 비판받던 관행에 따라 삼공의 지위에 오르기 위해 돈을 써서 관직을 샀다는 비판을 받았다.

같은 해 황건적의 난이 일어나 남양의 황건적 장만성이 거병하였다. 장만성이 공격을 받아 죽자 조홍이 남은 무리를 이끌고 완성(宛城)에서 농성하였다. 진적중랑장(鎭賊中郞將) 주준이 완성을 포위했으나, 6월부터 8월까지 여러 달 동안 함락시키지 못하자 조정에서는 주준을 소환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왔다. 이때 사공 장온은 다음과 같이 상소하며 주준을 변호했다.

진(秦)백기를 썼고, 연(燕)은 악의를 썼으나, 모두 해를 넘겨서야 겨우 적을 이길 수 있었습니다. 싸움 중에 장수를 바꾸는 것은 병가(兵家)에서 꺼리는 일입니다. 성공과 실패에 따라 책임을 지게 해야 합니다.


영제는 장온의 의견을 받아들여 주준을 계속 임무를 수행하게 했고, 주준은 마침내 조홍을 죽이고 완성을 함락시킬 수 있었다. 장온은 같은 해 사도로 승진하였는데, 유능하고 직책에 적합한 관리로 여겨졌음에도 이 임명 역시 뇌물을 통해 얻었다는 비판을 피하기 어려웠다.

2. 4. 양주 반란 진압과 동탁과의 갈등

185년 음력 8월, 황보숭의 뒤를 이어 양주 반란 진압군의 총사령관인 좌거기장군 겸 가절(假節)로 임명되었다.[3] 장온은 집금오 원방을 부장으로 삼고, 동탁, 주신 등을 휘하에 두었으며, 조기, 도겸, 손견 등을 참모로 맞이하여 총 10만 이상의 군대를 이끌고 미양에 주둔했다.

출정에 앞서 지인 장현(張玄)으로부터 "환관들을 먼저 처단하면 반란은 저절로 진압될 것"이라는 조언을 들었으나, 장온은 이를 실행하기 어렵다며 거절했다. 이는 그의 신중하거나 우유부단한 면모를 보여준다.

반란 진압 과정에서 장온은 휘하 장수였던 동탁과 심각한 갈등을 겪었다. 동탁은 군령을 어기고 장온에게 불손한 태도를 보였으며,[2] 이에 손견은 군법에 따라 동탁을 처형해야 한다고 강하게 주장했다. 그러나 장온은 동탁의 영향력을 고려하여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고,[2] 이 결정은 훗날 동탁이 장온에게 깊은 원한을 품는 계기가 되었다.

비록 185년 11월 미양 전투에서 반란군 주력을 격파하는 등 일부 성과를 거두었으나, 전반적인 반란 진압은 성공적이지 못했다. 186년 장안에서 태위로 임명되었지만, 양주의 불안은 계속되었다.

결국, 191년 겨울 10월, 과거의 악연으로 원한을 품고 있던 동탁에 의해 원술과 내통했다는 무고를 당하고 장안 시장에서 매질을 당해 비참하게 살해되었다. 동탁은 죽은 장온의 목을 베어 연회 자리에서 조롱하기까지 했다.

2. 4. 1. 동탁과의 불화

중평 2년(185년) 양주 반란 진압 당시, 동탁은 파로장군(破虜將軍)으로 임명되어 차기장군 장온의 지휘 하에 들어갔다.[3] 이때 장온은 부하 장수인 동탁을 통제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장온이 칙명으로 동탁을 불렀을 때, 동탁은 한참 뒤에야 나타났으며 장온을 향해 불손한 태도를 보였다. 이를 본 별부사마(別部司馬) 손견은 장온에게 다가가 동탁이 죄를 두려워하지 않고 거만하며, 군령을 무시하고 늦게 출두한 죄(첫째), 변장한수의 반란이 해를 넘기도록 진압을 지연시켜 군을 미혹하게 한 죄(둘째), 임무를 받고도 공적이 없으면서 오만하게 구는 죄(셋째)를 물어 군법에 따라 참수해야 한다고 강하게 주장했다.[2]

그러나 장온은 동탁이 농서 일대에서 명망이 높다는 이유로, 그를 죽이면 반란 평정에 차질이 생길 것을 우려하여 결단을 내리지 못했다. 오히려 손견에게 동탁의 의심을 살 수 있다며 물러나 있도록 말했다.[2] 손견은 장온의 우유부단함과 동탁을 두려워하는 태도를 비판했으며, 이후에도 동탁은 여러 차례 군령을 어겼으나 장온은 그를 제대로 제재하지 못했다. 이 일로 동탁은 장온과 손견에게 깊은 원한을 품게 되었다.

191년 겨울 10월, 조정의 실권을 장악한 동탁은 과거의 앙심을 품고 장온을 제거하기로 마음먹었다. 마침 태사령이 "대신 중 형벌을 받아 죽는 자가 있을 것"이라는 점괘를 내놓고 천변지이가 발생하자, 동탁은 이를 빌미로 삼았다. 그는 사람을 시켜 장온이 원술과 내통했다고 무고하게 한 뒤, 장온을 체포하여 장안 시장에서 태형으로 쳐서 죽였다. 동탁은 죽은 장온의 목을 베어 연회 자리에서 이를 보이며 조롱하는 잔인함을 보였다.

2. 4. 2. 반란 진압 과정

중평 원년(184년) 겨울, 북지군, 부한현(枹罕縣),[1] 하관현(河關縣), 황중(湟中)의 선령강(先零羌)과 의종호(義從胡)가 봉기하여 북궁백옥(北宮伯玉)과 이문후(李文侯)를 장군으로 추대했다. 이들은 양주의 변장한수를 위협하여 군정을 맡기고, 호강교위(護羌校尉) 영징(泠徵)과 금성태수 진의(陳懿)를 살해하며 양주 반란을 일으켰다.

이듬해인 중평 2년(185년), 반란군은 기병 수만 명을 이끌고 삼보(三輔) 지역을 침공했다. 처음 토벌에 나섰던 좌거기장군(左車騎將軍) 황보숭185년 음력 7월에 해임되자,[2] 음력 8월, 장온이 후임 좌거기장군 겸 가절(假節)에 임명되어 토벌을 이끌게 되었다. 집금오 원방이 부장으로 임명되었고,[3] 동탁은 파로장군(破虜將軍)으로, 주신(周愼)은 탕구장군(盪寇將軍)으로 장온의 지휘 하에 들어갔다. 장온은 총 10만 명 이상의 군대를 동원하여 미양(美陽)에 주둔시켰다. 조정에 요청하여 의랑(議郞) 조기를 장사(長史)로, 의랑 도겸을 사마(司馬)로 삼았으며, 별부사마(別部司馬) 손견을 도겸과 함께 배속시켰다. 공손찬도 오환 기병을 이끌고 종군하려 했으나, 오환족이 반란을 일으키자 유주로 돌아가야 했다.

출정에 앞서 장온은 군례에 따라 황제에게 배례하지 않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한편, 지인 장현(張玄)은 "천하에 도적이 들끓는 것은 환관(황문, 상시)들 때문이니, 그들을 먼저 처단하면 변장 같은 무리는 쉽게 제압할 수 있다"고 조언했으나, 장온은 이를 실행하기 어렵다며 거절했다.

185년 11월, 장온 군은 미양에서 북궁백옥의 군대를 격파했다. 이후 장온은 주신에게 군대를 주어 금성의 유중(楡中)에서 변장과 한수를 포위하게 했다. 동탁은 주신이 성공하지 못할 것이라 보고 장온에게 후방을 칠 것을 건의했으나 장온은 듣지 않고, 대신 동탁에게 선령강을 토벌하라고 명령했다. 동탁은 별부사마(別部司馬) 유정(劉靖)에게 보기 4천 명을 주어 안정에 주둔시켜 견제하면서 선령강을 상대했고,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었다. 반면, 주신은 손견의 진언("적이 규원으로 진출하여 퇴로를 끊을 것이다")을 무시하고 금성을 공격하다가 반격당해 보급품(치중)을 버리고 퇴각했다. 결국 장온의 군대는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지 못했다.

작전 중 동탁은 여러 차례 군령을 어기고 장온에게 무례하게 굴었다. 동탁의 군 내 인기를 의식한 장온은, 의분에 찬 손견이 "조정에 직소하여 동탁을 처형해야 한다"고 강하게 진언했음에도 불구하고, 실력자인 동탁을 두려워하여 이를 거부했다. 이 일로 손견은 장온을 결단력이 부족하다고 여겼고, 동탁은 장온과 손견에게 깊은 원한을 품게 되었다.

186년 2월, 장안에 머물던 장온은 태위로 승진했다. 이는 삼공이 수도 낙양이 아닌 외지에서 임명된 첫 사례였다. 그 해 겨울, 장온은 수도로 돌아왔고 호항후(互鄕侯)에 봉해졌다. 이후 반란군 내부에서는 한수변장, 북궁백옥, 이문후를 살해하고 세력을 장악했으며, 황보숭이 좌장군으로 복귀하여 동탁과 함께 한수 토벌을 이어갔다.

한편, 장온이 반란 토벌을 위해 군을 일으킬 때, 전 중산태수 장순이 종군을 희망했으나 장온이 이를 들어주지 않고 공손찬을 발탁한 일이 있었다. 이에 불만을 품은 장순은 동향의 전 태산 태수 장거 및 오환구력거 등과 손잡고 반란(장순의 난)을 일으키는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양주 반란 진압 과정에서 맺어진 동탁과의 악연은 결국 장온의 비극적인 최후로 이어졌다. 191년 겨울 10월(음력), 당시 장안에서 권력을 장악하고 있던 동탁은 과거의 원한을 이유로 장온을 원술과 내통했다는 무고를 뒤집어씌웠다. 동탁은 장온을 장안 시장에서 매질하여 죽이고, 그 목을 베어 연회 자리에서 보이기까지 했다.

2. 5. 동탁의 무고와 죽음

양주 반란 진압 당시 차기장군 장온 휘하의 동탁은 공공연히 장온을 경멸하고 군령을 따르지 않는 등 오만한 태도를 보였다. 이때 손견은 군율을 바로 세우기 위해 동탁을 처형해야 한다고 장온에게 강력히 건의했지만, 장온은 동탁의 세력을 두려워하여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 일로 인해 동탁은 장온에게 깊은 원한을 품게 되었다.

이후 동탁후한 말 혼란을 틈타 낙양에 입성하여 조정을 장악하고 스스로 태사를 칭하며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자, 위위 직위에 있던 장온은 사도 왕윤과 함께 동탁을 제거할 계획을 비밀리에 세웠다.

그러나 장온과 왕윤의 계획이 실행되기도 전에, 태사령이 별의 움직임을 보고 "대신 중에 형벌을 받아 죽을 자가 있을 것"이라고 동탁에게 보고하는 일이 발생했다. 과거 양주 반란 당시 손견이 자신(동탁)을 죽일 것을 장온에게 건의했으나 장온이 이를 거부했음에도 불구하고, 동탁은 이때의 일로 장온에게 앙심을 품고 있었다. 동탁은 이 예언을 빌미 삼아 사람을 시켜 장온이 원술과 몰래 내통하고 있다는 거짓 죄를 꾸며 무고하였다.

결국 장온은 초평 2년(191년) 11월 5일(음력 10월 1일, 임술일)[4] 장안의 시장 거리에서 공개적으로 매를 맞아 죽는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 동탁은 장온에 대한 증오심이 극심하여, 죽은 장온의 목을 베어 자신이 주최한 연회 자리에 가져와 사람들에게 보이는 잔혹함을 보이기도 했다.

소설 《삼국지연의》에서는 이 사건을 더욱 극적으로 각색하여, 동탁이 연회를 베풀던 중 여포에게 명령하여 장온을 즉석에서 참수하고 그 목을 접시에 담아 연회장에 내놓는 장면으로 묘사한다. 이는 동탁의 잔인무도함을 강조하기 위한 문학적 장치이며, 소설 속에서는 이 끔찍한 광경을 목격한 왕윤이 동탁을 제거하기 위한 연환계를 꾸미기로 결심하는 직접적인 계기가 된 것으로 그려진다.

3. 삼국지연의에서의 묘사

14세기 역사 소설인 『삼국지연의』에서는 장온손견유표와의 전투에서 사망한 것을 기뻐하며 동탁이 연 연회에서 여포에게 살해당하는 것으로 묘사된다. 동탁은 의붓아들인 여포에게 명령하여 장온을 연회장에서 끌어내 목을 베게 했고, 잘린 머리는 접시에 담겨 다른 손님들에게 보였다. 연회에 참석한 관리들은 모두 공포에 질려 비명을 지르고 식기를 떨어뜨리며 먹던 것을 토했지만, 동탁은 홀로 태연히 웃으며 술을 마시고 식사를 계속하는 모습으로 그려져 그의 잔혹함을 강조하는 장치로 사용되었다.

동탁은 장온을 죽인 이유로, 장온이 동탁의 경쟁자 중 한 명인 원술과 내통했다는 증거로 편지를 발견했기 때문이라고 다른 관리들에게 설명하며, 그 편지에는 다른 사람들은 연루되지 않았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덧붙인다.

또한 소설 속에서 장온은 왕윤과 오랜 친구 사이로 설정되어 있으며, 장온의 참혹한 죽음을 목격한 왕윤은 동탁을 제거하기 위해 "연환계"를 꾸미기로 결심하게 된다.

참조

[1] 서적 후한서
[2] 서적 후한서
[3] 서적 후한서
[4] 서적 후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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